노을빛 가사(袈裟)가 만든 하나의 줄
고행에도 주저앉지 않는 불심이자
불교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줄

43일간 1167km는 길이가 아니다 정신이다
정신의 확장이다 모든 인류는 더불어 함께 경험하는
한국불교의 이 시대를 귀하게 생각해야
스님과 불자들의 아린 발의 물집과 고통의 발톱들은
마음 개혁의 불빛으로 퍼져나가
세계 인류의 평화에 도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행선하는 모습.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행선하는 모습.

저 줄을 보라. 진 노을빛 가사(袈裟)가 하나의 줄을 만들며 하늘 아래 수를 놓고 있다. 이 지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저 간절한 화두 같은 하나의 줄…. 너울 같기도 하고 잔잔한 물결 같기도 한 저 줄은 그냥 평범한 줄이 아니다. 저것은 그냥 먹먹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줄이 아니다. 저것은 오직 단호하게 하나의 정신세계를 향하는 불사의 줄이다.

아름답다. 깊다. 넓다. 벼락같다. 고요하다. 그렇다. 저 줄은 누구의 명령으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엄중하면서도 질긴 저 줄은 그러나 칼바람에도 끄떡 않고 그 어떤 고행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불심의 정신 줄이다. 이 우주에 단 하나 살아 움직이는 저 줄, 저 줄의 점들은 살아있다. 스님들의 정신은 깨어있고 깨어있어도 그것도 모자라 더욱 더 더 깨어야 한다고 스스로 고행의 신발에 덥석 발을 넣은 스님들…. 상월결사의 번쩍임이 저기 보인다.

마음 내리고 마음 다지고 큰 맘 먹고 다시 마음을 비우고 부처님 길 하나만 바라보며 묵언수행하는 저 빛줄기의 행보를 보라. 마음 다 버리고 몸만 걷다가 몸 다 버리고 마음만 걷는 저 빛줄기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마치 일출과 같아라. 어두웠던 마음이 서서히 밝아오는 우주의 오직 하나밖에 없는 줄의 기적을 가슴 떨며 다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이런 빛줄기의 줄을 이 세상 어디에서 보랴! 안착하기 위하여, 깨달음을 위하여 불자들의 가슴을 넓히기 위하여, 화합을 위하여, 대 자비 철학을 위하여, 희망을 위하여 대 혁명적 생명존중의 순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놀랍고 가슴 떨린다. 어디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저 줄은 사람의 줄이 아니다. 불심의 줄이요 붓다의 줄이요 진정한 생명의 줄이다. 이 인도순례는 인도와 한국수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뿐이겠는가. 정신과 몸과 불심에 고통받는 중생의 재도약을 외치는 몸짓으로 첫발을 딛었으며, 새로운 불교 새로운 인류의 삶에 깨달음을 부활하기 위하여 2600년 만에 드디어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장정의 순례다.

2600년은 시간인가? 과학인가? 역사인가? 기적인가? 오직 불심 하나로 이어져 온 구원의 구원 영원의 영원이었다. 얼마나 귀한 줄인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 기적의 줄인가 얼마나 우리의 혼돈을 명확하게 말하는 줄인가. 불교는 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살아있음의 증명이다. “카필라”에서 “쿠시나가르” 어금니에 힘을 주는 걸음걸음, 2월9일에서 3월23일까지 43일간을 스님 불자 108명이 일출의 가사 빛으로 고요히 걷고 있는 저 모습…. 공기도 물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결코 쉽지 않은 그 길을 단 하나 부처님의 길이며 불심을 확장시키려는 우주적 의지를 두 발에 담고 걷는 것이다.

43일간 1167km는 길이가 아니다 정신이다. 정신의 확장이다. 모든 인류는 더불어 함께 경험하는 한국불교의 이 시대를 귀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부처님의 생애를 다시 되새긴다는 의미다. 이 기적은 부처님의 중흥을 넘어 한국과 인도의 교류활성화 불심의 불씨를 붙여 타오르게 하는 새 계기가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처가 누구인가 지독한 계급과 신분제도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이 땅에 고통 받는 중생을 해방시키고자 2600년 전 인도에 오신 것이다. 절대적인 인간긍정을 바탕으로 생명존중 사상은 대자비 철학이었다. 인도에서 걷고 있지만 한국의 땅에도 전율이 온다. 불심이 가슴으로 온다면 불심이 정신으로 되살아 난다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 기적의 전율을…. 이 기적은 다시 말해서 불심식목이다.

사람 하나에 작은 돌 하나에 풀꽃에 아름드리나무에 생물 무생물까지에 이 세상 모든 사물에 부처를 심는 일이다. 불심식목은 다시 시작된다. 다시 새 불심으로 불심을 심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불심 새 발견이다. 그래야만 2600년을 부처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부처님이 성불하신 이후로 녹야원에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인도의 그 험난하고도 신분제도가 절연한 계급차별 속에서도 불가촉천민을 스승으로 삼으며 설법하신 그 정신을 저 인도의 거리를 메우며 걷는 한국 불심의 절정을 세계는 지켜 보고 있다.

놀라운 것은 부처님의 환경과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는 척박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그 어려운 환경 적응을 고요히 수용하는 불교정신은 더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가슴 아프지만, 가슴이 뿌듯하다. 이런 모순의 힘은 무엇인가 저것은 개혁이다. 저것은 돌풍이다. 저것은 하늘과 땅의 새로운 천지창조의 출발이다. 부처님은 종교적 교주라기보다 대철학자며 사상가였다. 그리고 합리적 혁명가였다. 그 사상을 지금 가슴마다 불러 침묵으로 큰소리로 세상을 알리는 일이다. 인권존중을 천하에 알리는 일이다.

목표에는 원력(願力)이 쌓이고 수행은 거침이 없을 것이다. 장엄하고 황홀하다. 육신은 아프고 한계를 느끼기도 하련만은 스님 불자들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인도의 길을 깨우며 인도의 길을 다지며 새로운 의미로 개벽하고 있다.

거기 부처님이 계실 것이다. 부처님 정신의 부활에 부처님은 한국불교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도량을 새 시대의 불심낙관으로 기뻐하실 것이다. 그 발도장의 불심낙관이 영원하지 않겠는가. 불심초심에 의지의 횃불을 켜고 깨달음을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하는 일 또한 대개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스님과 불자들의 아린 발의 물집과 고통의 발톱들은 마음 개혁의 불빛으로 퍼져나가 세계 인류의 평화에 도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쯤은 몸은 달아나고 정신만 번뜩이며 살아있지 않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도 두 손을 모은다. 제발 정신의 날개에 힘을 잃지 않으시도록 말이다. 세계는 처절한 전쟁과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고 죽고 다치고 배고프고 다리를 잃은 사람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불심의 재창조로 그들의 외롭고 처참한 가슴 안에까지 인도의 발자국 소리가 닿는 기적을 희망하고 싶다.

지금도 극기의 의지로 걸어가고 있는 분들이여! 생각한다. 인도의 땅이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떤 기억을 되찾을 것인가. 그 오랜 몇 천의 기억 속에 부처의 발 냄새라도 맡는 것이 대자비의 세계관에 발을 들이는 일일 것이다.

발심 재발심의 응집력으로 인도와 한국수교의 기념 불심을 넘어 서서 세계의 불심으로 “알아차림”의 경지에서 깨쳐나가길 기원하고 싶다. 자기는 사라지지만 부처로 남아 부처로 변화하는 자신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걷기의 대 기적에 두 손을 모은다.

걷기도 좌선을 넘어서는 참선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 이후에도 끝은 없다. 끝이라는 그 앞에 허공경전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건너가는 길이 바로 부처의 길이 아니던가. 인도의 걸음소리를 베개 밑으로 들으며 싸늘한 봄기운을 가슴으로 맞이하는 행운을 누린다. 43일 마지막 걸음이 안착할 때 그 순간의 충만감을 상상하면 온몸이 저리다. 상월결사여, 완결의 행운을 바라노니 이 시대의 사람으로 태어나 이런 대기적의 가사 행렬에 마음을 함께 하는 일에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이것이야말로 “머뭇거리지 말고 정진하라” 하신 마지막 말씀에 동참하는 일이 아닐까. 안착의 충만감이 온 세계인의 온기가 되기를, 그렇게 되시기를….

신달자 시인
신달자 시인

 

[불교신문 3759호/2023년3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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