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새벽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우려가 현실이 됐다. '투둑투둑' 천막 텐트를 잔잔하게 때리던 빗줄기는 이내 굵어져 시야를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 붓는 빗줄기에 순례단 발걸음이 멈칫했다. 개인 지참 필수품이던 우비를 미처 챙기지 못한 이들에게 일회용 우비가 지급되면서 재정비를 마친 순례단이 다시금 출발선에 섰다.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서 장기리로 넘어가는 길. 삼보사찰 천리순례 11일차인 10월11일, 우중 행군 속 삼보사찰 중 마지막 사찰인 통도사를 향한 천리순례단의 발걸음에 결연함이 담겼다.
경북 고령 끄트머리로 향하던 순례단에게 머잖아 고비가 왔다. 고도 500~1000m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고갯길도 참고 견디며 넘었지만 우비 속을 파고드는 비바람은 막을 길이 없다. 장시간의 행군 속 우의 안의 가사는 물론 장삼에 속옷까지, 빗물과 한기가 파고 들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신발은 무거움을 더했다. 순례단은 젖은 신발 속 상처와 함께 퉁퉁 불어버린 두 발로 힘겹게 빗속을 걸었다.
우중 행선 속 저마다의 고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경쾌한 농담은 오고갔다. 출발 5km가 지난 지점, 정비를 위해 잠시 주어진 휴식시간. 선광스님이 비에 젖지 않게 신발 위 발목을 검은 비닐로 칭칭 감으며 “씻지도 못했는데 빗물로 세수를 하니 좋다”고 호탕하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말과 행동이 다르다’며 웃음보가 터졌다.
삼조스님은 “우리 스님이 살림살이가 궁핍해 그렇다”며 농을 더했다. 먼발치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정혜스님은 이런 상황에도 의연하기만 한 순례단이 뿌듯하다. 정혜스님은 “우리들은 비가 와도 아무렇지 않다”며 “부처님 가피력 덕분에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했다.
정비를 마친 순례단은 다시금 길가로 나와 너른 벌판을 걸었다. 노랗게 익은 벼가 빽빽이 들어찬 논 길, 하천을 따라 예쁘게 길을 낸 산책길 외에도 위험한 차도를 따라 행선했다. 차들이 쌩쌩 지나며 매캐한 냄새와 소음을 뿌리던 길바닥 8개 조 중 맨 뒤에서 두 번째 대열 제일 앞에 선 상월선원 만행결사 회주 자승스님은 역시나 말이 없다. 젖은 신발과 비옷을 툴툴 털어버린 채, 빗속에서도 환히 웃는 순례단을 지켜볼 뿐이다.






이날 이동거리는 23km. 평균 이동 거리와 비교해 결코 길지 않은 구간이지만 걷기 내내 내리던 빗줄기로 회향은 속절 없이 늦어졌다. 틈틈이 주어진 10분 간의 휴식 외에는 묵언 행선 하는 내내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염주를 손에 쥐었다. 다시 출발 지점에 섰을 때는 서로 우비는 잘 입었는지, 혹여 빗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발 상태는 괜찮은지, 각자의 상태를 확인한 후 ‘힘내자’ ‘화이팅’을 외쳤다. 나와 남을 위한 응원과 격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똑같은 모자를 걸친 충재가 100여 명 무리가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지났다.
순례 중 중간 지점인 고령군 생활 체육공원에서 잠시 가진 휴식 시간. 다른 이들에게 가림 천막을 양보하고 잔디밭에서 잠시 쉬던 탄하스님은 우중 행선에도 웃음이 만발이다. 탄하스님은 “어렵고 고단하지만 그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혼자는 못하지만 사부대중이 함께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 데서 자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순례, 천리순례단의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모두 불안에서 자유롭다. ‘함께 하니 꽃길’이라는 순례단들의 마음가짐은 진흙탕 길이라도 꽃 비단길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날 천리순례 일일 참가자로는 제22교구본사 대흥사 조실 보선스님이 우중 행선에 참여해 주목을 끌었다. 보선스님은 “비를 맞으며 순례에 함께 해보니 인도에서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새삼 느끼게 됐다”며 “이런 법석을 마련한 자승스님이 부처님법을 잇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고 오늘 대중과 함께 한 시간들이 우리 이웃을 위해 회향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악천후 속 순례단을 맞이하는 행렬도 줄을 이었다. 팔공총림 동화사 회주 의현스님, 주지 능종스님의 환대는 물론 본말사 30개 사찰 현수막이 거리 곳곳에 걸렸으며 동화사 대중 200여 명이 빗 속 환영 인사를 전했다. 은해사 회주 돈명스님, 전등사 회주 장윤스님,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 관음사 주지 허운스님 등도 먼 길을 찾아 천리순례단을 격려했다. 불국사 성보박물관장 종상스님, 주지 종우스님 등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 스님들 발길도 이어졌다. 주호영 국회의원도 지난번에 이어 일일 참가자로 순례에 참여, 맨발로 빗길을 걸으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천리순례단은 12일차인 다음날 경북 고령에서 경남 창녕으로 향한다.












고령=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삼보사찰 천리순례 11일차] ② “딸과 평생 한번뿐일 삼보사찰 순례”
- [삼보사찰 천리순례 10일차] 245km 걸어 박수와 환호 속 경북 입성
- [삼보사찰 천리순례 9일차] 가야산에 이르러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드니
- [삼보사찰 천리순례 특집] 불교중흥을 위한 위대한 발걸음, 그 중간 기착지 ‘합천 가야산 해인사’
- [삼보사찰 천리순례 8일차] ② 순례단 찾은 총무원장 원행스님과 본사 주지 스님들
- [삼보사찰 천리순례 8일차] ①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 [삼보사찰 천리순례 7일차] 조금만 더 가자…응원과 격려 속 최장거리 완보
- [삼보사찰 천리순례 6일차] ② 자승스님 실상사 참배…도법스님과 환담
- [삼보사찰 천리순례 6일차] ① 청매선사 깨달음 얻은 곳, 오도재를 넘어
- [삼보사찰 천리순례 5일차] 힘들어도 자비의 꽃은 핀다
- [삼보사찰 천리순례 4일차] 지리산 가거든…자승스님 발원 “복 짓는 기도 합시다”
- [삼보사찰 천리순례 3일차] 안개 자욱한 섬진강 따라 화엄의 세계로
- [영상] 삼보사찰 천리순례 입재식…한국불교 중흥 위한 423km 대장정 ‘시작’
- [삼보사찰 천리순례 2일차] ② 사찰 참배하며…무량 공덕 짓는 길
- [삼보사찰 천리순례 2일차] ① 함께 걷는 길, 자리이타의 길
- [삼보사찰 천리순례 1일차] ② 삼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423km 톺아보기
- [삼보사찰 천리순례 1일차] ① 한국불교 새 운동…천리길 대장정 시작
- [삼보사찰 천리순례 12일차] ① 누적 295km...순례단 가는 곳마다 ‘들썩’
- [삼보사찰 천리순례 12일차] ② “부부 아니고 50년 수행도반으로 걷습니다”
- [삼보사찰 천리순례 13일차] 발톱이 들리고 물집 터져도…걷고 또 걷는다
- [삼보사찰 천리순례] 사명감 하나로 밤낮 없이 일하는 숨은 영웅들
- [삼보사찰 천리순례 14일차] ② ‘적극적 포교 공세 나서야’
- [삼보사찰 천리순례 15일차] 긴장 속 호국성지 도착…통도사까지 70km
- [삼보사찰 천리순례 16일차] 길 위 수장의 어깨...함께 짊어짐에
- [삼보사찰 천리순례 17일차] ② “우리 모두가 부처님이었다”
- [삼보사찰 천리순례 17일차] ① 마지막 고비 넘어…황금 물결 일렁인 사자평에서 위법망구를 새기며
- [삼보사찰 천리순례 18일차] 대장정 회향…금강계단 돌며 일불제자 본분사 다짐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