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금풍' 자승스님

“‘아주 건강하고 밝고 공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청년.’ 40여 년 전 자승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이다. 전국 선원에서 화두를 들던 또래의 수좌들이 만든 ‘백납회(白衲會)’라는 모임에서였다. 1994년 종단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같이 일했다. 자승스님이 가진 최고의 능력을 한 가지 꼽으라면 그건 친화력이겠다. 단순히 인간관계에 밝다는 뜻이 아니다. 형편이 어려운 스님들이 있으면 소문내지 않고 남몰래 돕는 것을 많이 봐왔다. 알다시피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사회적 약자들을 성심껏 도왔다. 가까이서 오래 지켜봐온 입장에서, 그러한 행동들이 결코 겉치레나 이벤트가 아니었음을 잘 안다(조계종 원로의원 보선스님).”
조계종 제33․34대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떠난다. 2009년 10월31일부터 2017년 10월30일까지, 8년 만의 퇴임이다. ‘임기를 원만히 마무리한 유일한 연임 총무원장’이라는 찬사가 무색하게, 마지막 발걸음은 가볍고 싱거웠다. 마지막 교계 기자간담회에서의 일성은 “소감이 어떤가, 퇴임해서 뭐 할 건가, 이런 거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흥’이 많은 분이란 게 첫인상이다. 내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어느 방송에 나왔는지 다 알고 계시더라. 불교문화를 많이 알려달라는 당부도 하셨다. 방송에 나가면 불자라는 이야기를 꼭 해달라고도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후 방송에 나가면 꼭 불자라고 밝히게 된다(남상일 국악인).”
다만 퇴임식을 열흘 앞두고 종무원들과 일일이 이별의 합장을 나누며 정답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원섭섭한 모습이었고 다 내주고 떠나는 모습이었다. 외양만 아니라 실상도 그렇다. 10월초 종단 주요 사업인 승려복지를 비롯한 포교·교육기금, 종무원조합 격려금 등으로 총 2억 원을 보시했다. 8년 동안 차곡차곡 모은 월급을 한방에 풀었다.
“지난 몇 해간 스님을 옆에서 지켜보며 느낀 것은 업무를 올바르게 처리하고 꾸밈이 없다는 것이었다(박홍우 변호사 전 대전고등법원장).”
총무원장으로서의 마지막은 이처럼 매우 조용하고 소탈하다. 그러나 지금만 조용할 뿐이다. 자승스님의 8년은 조계종의 8년이기도 하다. 결코 시간은 그냥 또는 대충 흘러가지 않았다. 일례로 무려 293건의 종법 제․개정은 집행부가 흘린 땀방울의 부피다.
“2011년 불자대상을 받았을 때 총무원장 스님을 처음 만났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 당신의 몸을 낮춰 키를 맞추려는 모습을 보았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이라는 걸 느꼈다.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편하게 대해주셔서 ‘최대종단의 수장’이라는 거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올해도 장애인이 불자대상을 받았다(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소통과 화합’을 모토로 첫발을 내딛은 자승스님은 종단사 최초의 협치(協治)를 구상했다. 사부대중공사는 대화와 설득을 통한 종무행정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대중의 지지와 공감 속에서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사찰재정공개를 이뤄냈고 승려노후복지의 기반을 닦았다. 바르고 열심히 사는 종도라면 끝까지 종단이 보살핀다는 믿음을 심어줬다.
“여러 날 동안 유럽 성지순례를 같이 하면서 나는 가톨릭의 쇄신을, 자승스님은 불교의 쇄신을 이야기했다. 특히 스님들이 재정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체계가 세워지면 좋겠다면서 스님들의 노후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방안에 대한 고민을 들려주었다. 상대방의 의견을 겸손하게 경청하고, 원칙에 충실하려는 모습에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됐다(김희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렇듯 스님을 중심으로 사부대중은 힘을 모았다. 나아가 세상을 위해 그 힘을 썼다. ‘소통과 화합’을 모토로 첫발을 내딛은 자승스님은 가장 먼저 용산참사 현장위문을 택했다. 앞으로의 조계종은 아프고 서러운 이들을 위해 존재하리라는 상징적 행보로 평가된다.
“2011년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하고 백두대간에서 하산했을 당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조계종이었다. 중대한 결단을 앞두고 민심의 큰 뜻을 여쭤야 할 때면 총무원장 스님을 찾아뵙곤 했던 것 같다. 용산참사 구속자 특별사면에 힘을 보태주시고, 세월호의 비극에 함께 아파하시고, 작년 겨울 출렁이는 광장 속 민심의 분노를 헤아려주셨다(박원순 서울시장).”
이후 쌍용차 해고노동자, 4.16 세월호 참사, 통합진보당 해산 등 굵직굵직한 사회적 현안 앞에서 자비는 입증됐다. 절에 쫓겨 오거나 울면서 오는 이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았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자신을 위해 탄원서를 써준 스님에 대한 이석기 전 의원의 감사편지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박근혜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했던 2013년 11월 당시 의원단은 삭발을 하고 국회 본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였다. 완전히 낙인찍힌 상황에서 어디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단식 중인 몸으로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날 스님께서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게 답답하지만 함께 지혜를 모아보자”라고 하셨다. 차갑게 얼어있던 저희의 마음을 녹여주셨다(김재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물론 지난 8년간 종단이 궁극적으로 꿈꾸던 건 화쟁(和諍)이었다. 보수와 진보, 자본력과 생존권이 뒤엉킨 아수라장에서 이념에 앞서 인간을 먼저 챙겼고 진정으로 함께 살 길을 모색해왔다. 2015년 연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조계사 피신사태’는 자칫하면 한국사회의 총체적 모순이 종단에서 터질 뻔한 순간이었다. 유력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한 스님의 절묘한 중재는 공권력과 노동계의 자존심을 모두 세워줬다.
“‘한상균 사태’가 원만하게 마무리된 이유는 조계종이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노력한 덕분이다. 경찰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서로 힘을 합치고 대화로 해결을 해나갔고, 총무원장 스님이 용단을 내려주셨다(강신명 전 경찰청장).”
법문에서 사부대중공사에서 스님이 늘 강조해온 개념은 공심(公心)이다. ‘주지(住持) 불교’를 극복해야만 승가공동체가 복원된다고 당부했고 종무원들에겐 늘 ‘우리!’를 외치게 했다. '오른쪽'에 제일 가깝다는 불교임에도, 촛불민심을 계승해 종교계에선 유일하게 ‘박근혜 퇴진’을 천명한 것도 어쩌면 우리의 목소리를 받든 결과다.
“모든 학생들의 얼굴을 마주하시고, 미소로 악수를 건네시고, 한 명씩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그리 격식을 차리지도 않았다. 스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진정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조셉 보라쿠파타 릉구르 ‘보리가람 농업기술대학’ 교장).”
이제 자승스님은 종도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이번 겨울 동안거, 인제 백담사에 방부를 들일 계획이다. 3개월간 비좁은 독방 안에서 화두를 드는 무문관(無門關)이다. 사연이 있다. 20대 중반 갓 제대를 하고서 백담사 산내 암자인 봉정암에 올라가 하루 네 차례에 걸쳐 4분 정근 기도를 했다. 스님은 기자간담회에서 “그때만 해도 봉정암에는 인법당, 대피소, 화장실 등이 전부였다”며 “10월 초가 되면 사람들도 다 철수하는데, 혼자 5개월 동안 하루 8시간 기도했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이때 으레 초발심(初發心)을 이야기한다.
“비구니 스님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길 위에서’를 찍었을 때다. 야심차게 영화는 개봉했는데 반응이 별로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영화를 보게 된 자승스님이 “이런 영화는 불교계에서 봐줘야 한다”고 하셨다고 하더라. 그리고 바로 다음날 교계 언론 편집국장들을 모으셨다. 그때 그 도움이 없었다면 영화는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스님은 농담으로라도 생색 한번 내지 않으셨다. 그래도 딴에는 너무 고마워서 총무원에 떡이라도 돌리려고 했다. “우리는 떡 좋아하지 않으니 안 해도 됩니다.” 본인이 어떤 일을 할 때 이후의 보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영화 ‘노무현입니다’ 이창재 감독).”
공교롭게도 스님이 물러나는 시간은 가을이다. 선가(禪家)에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고사가 전한다. 가을 찬바람에 잎이 다 떨어져 나무가 본래면목을 드러낸다는 의미다. 다 내주고 홀연히 떠난다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뒷모습이다. 그리고 낙엽은 다시 종단의 뿌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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